쿠리타 겐조 야뇨증 연쇄살인범

안녕하세요 사회이슈TV입니다. 오늘은 일본의 한 특이한 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해드리려고 합니다. 범인의 이름은 쿠리타 겐조입니다. 편의상 쿠리타라고 부르겠습니다. 栗田源藏 라고 표기한다고 하네요. 

 

쿠리타 겐조는 1926년생입니다. 옛날 사람이죠, 아키타현의 오카치군에 있는 신세이 마을에서 가난한 집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자녀는 무턱대고 12명이나 낳은 상태라 부모와 12명의 자녀는 허덕이는 극도의 빈곤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쿠리타는 다소 소극적인 성격이었는데요, 특히 야뇨증이 심했다고 합니다. 

 

야뇨증은 대소변을 가릴 시기인 5세가 지나서도 뚜렷한 신체적 이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밤에 오줌을 지리는 것을 말합니다. 쿠리타는 이러한 야뇨증 때문에 오줌과 관련된 별명을 많이 얻어 놀림을 심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별다른 보살핌이나 관심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된 쿠리타는 아직도 고치지 않고 더욱 심해진 야뇨증 때문에 계속 몸에서 소변 냄새가 잔류하게 되는데요, 이 때문에 이지메를 당한 쿠리타는 학교를 빼먹고 혼자 산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집이 더더욱 어려워지자 쿠리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농가에서 머슴일을 하는데요, 이 마저도 야뇨증 때문에 금새 해고되었다고 합니다. 직장을 옮겨도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심지어는 19세에 육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 때도 야뇨증 때문에 2개월만에 조기전역을 하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누적된 쿠리타가 예상이 되는데요.

 

세계 제2차대전 후, 쿠리타는 훗카이도로 건너갑니다. 그 곳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일을 시작하는데요, 육체노동을 하며 남자들끼리의 공동생활을 통해 거친 성격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무렵 쿠리타는 1946년 절도를 하여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살게 되는데요. 2년 뒤 쿠리타는 쌀을 도쿄에 파는 불법거래를 하던 중 만난 17세의 소녀 무라이 하츠를 알게 됩니다. 교재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결혼을 이야기하는 사이로 발전하는데요. 그런데 쿠리타는 하츠의 친구인 스즈키 요시코와 양다리를 하며 그녀와도 결혼약속을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하츠는 요시코와 헤어지라고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요시코를 죽이고 암매장했다는 뜻밖의 충격적인 쿠리타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하츠는 당연히 이를 경찰에 알리려고 하였고 쿠리타는 하츠를 붙잡아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 손수건으로 하츠를 질식사시킨 뒤 그로도 모자랐는지 돌로 머리를 수차례 내려친 뒤 매장하게 됩니다. 

 

그 사건은 발각되지 않았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술에 만취한 쿠리타가 지나가던 행인에게 시비를 걸게 되고 상황은 심각해져 결국 살인 미수 및 상해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게 됩니다. 출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절도죄로 들어가고 나가고를 반복하는 삶을 살게된 쿠리타. 

 

1951년 쿠리타는 토치기현 오야마역에서 내려 마을을 돌아다니며 뭔가 훔칠만한 물건이 있는 집을 찾아나섭니다. 그러던 중 집 안에서 자고 있던 한 젊은 여성을 발견하는데요. 그녀는 마스야마 후미코로 당시 24세였고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든 상황이었는데요, 쿠리타는 그 모습을 보고 바지를 벗은 채로 집에 침입합니다. 후미코는 잠에서 깨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쿠리타를 옷으로 후미코의 목을 졸라 강간 후 교살합니다. 그 뒤 엽기적으로 시신을 다시 한번 범하는데요, 집에 대변을 보고 달아납니다. 

 

가끔 범인들이 범죄현장에 대변을 보고 가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는 심리학적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범인들의 습관 중 하나라고 합니다. 

 

두달 뒤 쿠리타는 치바현의 오키츠역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눈에 띈 것은 전과 같이 20대의 주부인 코바야시 후요노, 역시 아이와 함께 있는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아이는 2살인 갓난쟁이와 7살인 어린 딸로 둘을 데리고 있었는데요, 쿠리타는 이들의 귀갓길을 따라다니며 몸매가 좋아서 마음에 든다며 추파를 던졌지만 (성희롱이죠) 후요노는 어두운 길이었기 때문에 심기를 거스리지 않기 위하여 적당히 달래고 거절하면서 집에 가는 길을 서두릅니다. 새벽 1시쯤이 되어 거의 집에 도달했는데요.  초조해진 쿠리타는 돌변하여 후요노를 덮칩니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하자 쿠리타는 시끄럽다며 자갈로 갓난아이의 머리를 때리고 수십미터 아래의 낭떠러지로 아이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엄마 뒤에 숨은 7살의 딸아이도 머리와 얼굴을 수차례 강타한 뒤 낭떠러지로 던져 떨어트려버립니다. 쿠리타는 절망하는 후요노를 강간하고 목을 조른 뒤 그 역시 낭떠러지로 밀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러나 벼랑의 중턱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요, 램프로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던 쿠리타가 이들이 살아있음을 눈치채고 직접 절벽을 타고 내려가 그들을 돌로 때려 살해합니다. 

 

쿠리타의 살인행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다음해인 1952년에도 치바현 케미가와 마을에 침입하여 20대의 주부를 목졸라 살해하고 함께 있던 숙모가 잠에서 깨어 소리를 지르자 식칼로 배를 찔러 사망케합니다. 그 후로 정말 어이없게도 숨진 20대 주부를 상대로 성교합니다. 이쯤되면 악마도 혀를 내두르며 갈 판인데요. 이 날 쿠리타는 이 집에서 지문을 상당 수 남기게 되고 이를 계기로 체포되기 됩니다. 

 

치바 지방 법원에서는 쿠리타에게 사형을 판결합니다. 그리고 쿠리타는 재심을 청구하는데요, 이는 당연히 기각됩니다. 쿠리타는 그 이후로도 재심을 여러차례 제기하는데 모두 기각됩니다. 

 

쿠리타는 사형이 확실한데도 왜 여러번 재심을 청구했느냐에 대해서는 이 과정 자체가 길고 이 기간엔 사형이 집행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사형날짜를 미루기 위한 꼼수였다고 볼 수 있죠.

 

이러는 동안 사형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일본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데요. 법무성은 당시 특별히 극악한 범죄자는 세상에 있으면 안되며 도태시켜야만 한다고 말하였고, 쿠리타 겐조는 1959년 10월 14일 33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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