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광장 살인운전 사건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

사회이슈TV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사건은 여의도 광장 살인운전 사건 인데요. 제 블로그 글을 가져가서 유튜브 대본으로 쓰시는 분이 계시던데 조치 중입니다. 여의도에서 살인 운전쇼를 했던 김용제.

그에 대해 조명해보고 몇 가지 정보를 드리고자 합니다.

다소 긴 글이지만 반전이 숨어 있으니 끝까지 읽어보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1991년 10월 19일 토요일 사람이 가득한 여의도 광장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여의도광장은 지금의 여의도공원입니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지금의 수풀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원의 모습이 아닌 말 그대로 드넓은 공터, 광장의 모습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4시 무렵 여의도 KBS 본관 앞에는 프라이드 승용차 한 대가 광장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운전자는 당시 20대이던 김용제.

김용제는 어릴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청각, 어머니는 시각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김용제의 시각장애는 유전성으로 추정됩니다. 김용제는 훗날 본인의 시각장애는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어릴 때 잘 먹지 못해 눈이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때 가난을 견디다못해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몇 년 후에는 남은 아버지마저 농약으로 자살했습니다. 김용제는 눈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체구도 작았으며 소극적인 성격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했고, 성적도 좋지 못해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했습니다. 불만과 분노를 표출할 수단과 방법을 알지 못했고 가슴속에 응어리만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청년기에는 칼을 품고 다니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서 적발되어 '강도 예비 음모'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3개월간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때의 교도소 생활은 소심한 김용제에게 반성의 기회가 되었고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말고 성실하게 살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사건 당시 판사가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 새출발을 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김용제에게는 자극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서울과 부산을 전전하며 일손이 부족한 공장 등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였지만 시력이 나빠 눈이 잘 안보이다보니 실수가 잦았고 이를 참다 못한 사장은 그를 해고하게 됩니다. 결국 김용제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의 양말 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김용제는 마지막으로 다닌 화곡동 양말 공장에서 곧 해고될 것을 직감하고는 사장이 소유하고 있던 기아 프라이드 열쇠를 복사해둡니다. 그의 직감대로 그는 곧 해고되었고 그렇게 4개월간 분노로 가득찬 그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혼자 죽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눈 좀 나쁘다고 사람을 무시하고.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두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수중에 돈이 모두 소진되어 과자 한봉지 조차 사먹을 수 없게 된 그때에 항상 주머니에 부적처럼 갖고 다니던 프라이드차량의 복사키를 이용해 범죄를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 여의도광장

 

1991년 10월 17일 범행 이틀전. 김용제는 마지막으로 일했던 양말공장의 사장 김씨가 주로 차를 세워두는 서울 화곡동 골목으로 가서 복사키로 차문을 엽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이 열쇠구멍을 찾고 돌리는데도 한참이 걸렸다고 해요. 여러 가지 실수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차를 몰고 화곡동 골목을 빠져나온 김용제는 여의도 KBS 앞으로 차를 가져갑니다.

 

1991년 10월 19일 오후 4시. 김용제는 20년간 눌러담았던 분노와 복수심을 폭발할 준비를 마칩니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군중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는 자동차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첫 희생자는 초등학교 5학년 현일군이었습니다. 현일군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옆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던 여섯 살 유치원생 신재가 차에 치었습니다. 현일이와 신재는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세 번째 차와 충돌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영철군이었습니다. 다행이 영철군은 중태에 빠졌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의도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김용제는 멈추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김용제는 쓰러진 사람 위로도 차를 몰았습니다.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21명이 더 차에 치이거나 깔려 부상을 당했고 차는 200m를 더 달리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은 뒤 멈추었습니다. 차가 멈추자마자 시민들은 주변에서 돌이나 나무막대기를 주워든 채 차를 에워쌌습니다. 김용제는 문을 걸어 잠궈 안에서 버텼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유리창을 깨뜨리고 김용제를 차 밖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김용제는 이를 뿌리치고 옆에 있던 중학교 1학년 김양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칼로 김양의 배를 찔렀으나 배에 차고 있던 벨트로 인하여 부상을 입지 않았고 사흘을 굶고 눈이 흐릿한 김용제의 빈틈을 노려 시민 중 김창석씨가 날렵하게 칼을 든 김용제를 팔을 낚아챔으로 인해 이 인질극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용제의 범행 재연

김용제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의 여의도광장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길바닥 곳곳에 피가 있었고 찢어진 옷가지들과 부서진 자전거의 파편들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범죄 피해를 구제하는 법률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그 치료와 피해 회복을 고스란히 본인이나 가족들이 떠앉아야했습니다.

김용제는 11월 19일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제기하지만 전부 기각됐고, 1992년 8월 1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그에게 치여 즉사한 당시 유치원생 윤신재군의 할머니인 서윤범 할머니는 이런 사정을 듣고 되려 범인을 이해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서를 썼으며 기도까지 해 주었다. 당시 기도 내용이 얼마전 방송에서 나왔다. "지금도 용제가 정말 새사람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신다면..." 사형 집행 당일에도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는 가톨릭을 믿어서인지 이 자리에 온 신부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썼는데 그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전해집니다.

1997년 12월 30일 사행이 집행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사형폐지국가입니다. 1997년 이 날 그 유명한 사행수 김선자도 이 날 김용제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이 집행은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의 마지막 사형집행입니다.

오늘 사건은 여기까지입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살인질주를 벌인 대한민국 마지막 사형수 김용제. 어떻게 보십니까?

 

날마다 험한 뉴스와 사건 사고가 가득한 요즘이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에겐 항상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사회이슈TV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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